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황후 여씨 (문단 편집) === 비판론 === 여후의 치세가 태평성세였다고는 하지만 이는 여후가 잘났다기보단 유방과 그 공신들의 영향이 크다. 첫째, 전쟁이 없었던 것은 이미 유방 최대의 숙적이었던 항우가 패망하고 한신, 팽월 같은 잠재적인 위험인물 내지는 반역자들이 토사구팽 당하거나 죽어서 세력이 와해됐기 때문인데 이는 생전 유방의 업적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여후 시절에도 실질적으로 제국의 실무를 담당한 인재들은 대부분 유방의 공신이거나 유방이 발탁한 인물들 뿐이었다. 여후가 훗날 흉노와의 전쟁을 선포하려 했을 때 다행히 계포의 만류로 그만두게 되는데 이 계포 또한 본래 항우의 수하였다가 유방에게 용서를 받고 발탁된 인물이었다.[* 여후 때 친척인 여씨들을 대거 등용했지만 이들이 고제 시절 공을 세운 적도 없었고 여후 시절에도 유능함을 보인 인물들은 없었다. 이는 여후 사후 여씨가 몰락한 원인이 되었다.] 다만 한신이 회음후로 강등된 뒤 최종적으로 숙청한 것은 여후의 짓이었으며, 영포 토벌엔 유여의 태자책봉 실패 후 완전히 의기소침해진 유방이 혜제를 보낼 생각이었지만 여후의 설득으로 본인이 출진하게 된다. 한신이나 장오의 처우를 보면 알듯이 직접적으로 반기를 들지 않으면 어느 정도 봐주는 경향이 고조에게 있었던 반면, 여후는 위험요소가 있는 것 자체를 용납 못하는 타입이었다.[* 이는 고제와 여후의 기질과 능력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래 고제는 자기가 몸으로 뛰어서 세운 제국이었기에 군사적 능력도 충분했고, 군대와 공신의 지지도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었던 데다가 정치적인 면에서도 한신 따윈 가지고 놀 정도로 출중했지만 여후는 기본적으로 고제에 업혀서 권력을 휘두르는 형태였기 때문에 고제만한 권위가 없었고 또, 친정인 여씨 집안에도 정치 및 군사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 전무했다. 한신을 죽일 때도 그런 점을 굳이 숨기지 않아서 대놓고 내가 너를 감당할 수 없어서 죽인다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한신의 힘을 정말로 꺾은 건 그를 제왕에서 초왕으로 전봉하고 다시 회음후로 강등한 것인데 이 일은 전부 고제가 해낸 것이다. 해하전투 직후 한신 휘하에 20만 대군이 있었고 초왕 시절에도 이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고제에게 순식간에 밀렸고 이는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도 고제의 인덕과 능력이 비범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이미 회음후로 강등된 시절의 한신은 아무런 힘도 없었으므로 그를 죽이는 건 명분과 타이밍의 문제였을 뿐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둘째, 무위지치를 추구한 건 여후가 아니라 [[소하]]와 [[조참]]의 공이 컸다. 소하가 법을 제정하고 조참이 이를 따르니 이 또한 그 둘을 승상으로 중용하라 유언한 유방의 혜안이 빛을 발했다고 봐야 한다. 더불어 정치에 능하고 통치를 잘했다지만 여씨들을 우대하기 위해서라면 숱하게 규칙을 어지럽히고 전횡을 저질렀다. 여후 치세 8년간 태평성대였다면 남월왕 조타에게 일방적으로 농락당하고, 혜제 때만 해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제나라가 두려워서 친족이 살해당해도 따지지도 못하는 비굴한 모습은 이상하다. 여후가 [[강약약강|약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는 자체적인 군사력을 지닌 상대였다.]] 당시 왕은 황제의 신하이긴 했지만 자체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는 등 반 독립적인 상태였다. 숙청 대상들을 잘 보면 알겠지만 초반에는 자체척인 군사력을 지닌 인물들이나 유여의처럼 그 자체로 제위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이 주요 숙청대상이었으며, 대부분의 이성왕들이 정리된 이후에는 동성왕 쪽으로 숙청 대상이 이동된 걸 알 수 있다. 반대로 군사력이 없는 공신들은 그다지 손대지 않는 등 어느 정도 숙청에 방침이 있었다. 유방에 비해 사적 제재도 빈번해서 진평이 고작 여수의 모함에 떨며 지내는 등 혜제 때까지만 해도 직언에 자유로웠던 한나라 조정의 분위기는 여후의 대에선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번쾌가 여후에게 아첨하기 위해 흉노를 토벌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선동에 앞장서고, 계포가 나설 때까지 모두 눈치를 보느라 호응하기 바빴을 정도. 여후 때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분명히 성격이 좋아서 선택됐을 [[한문제]]를 상대로도 공신들이 지레 겁을 먹어서 말썽이 일어나기도 했다.[* 평원군은 심이기와의 친분을 한 문제가 트집잡자 "내가 빨리 죽어야 가족들이라도 무사할거다."라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자살해버렸고, 용맹함으로 이름이 자자했던 주발도 문제에게 찍혔다는 생각이 들자 한동안 정서불안 증세를 보였다. 다만 역으로 한 문제가 여후 사후에 공신들을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등 어느 시점으로 보는냐에 따라서 상당히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씨 및 중신들과 의견을 일치하고 손을 잡아 부국강병에 힘쓰기는 커녕, 마음에 안들면 무조건 숙청만 해대는 잔혹함으로 인해 [[손절|유방 생전에는 초군의 포로 생활을 했던 여후를 동정하고 보호했던 건국공신들이 합심해서 여씨를 몰살시키고]], 혹여 외척이 또 기승을 부릴까봐 1등 공신이었던 유장 형제와의 밀약까지 뒤집으며 [[한문제]]를 옹립할 만큼 공신들의 마음을 떠나게 만들었다. 여후의 집권은 엄연히 공신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인데,[*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나라에서 황제의 사망을 4일이나 숨길 수 있었다는 것이 쉽게 가능할만한 상황이라고 보긴 어렵다. 역상에게 새어나갔던 것을 보면 알만한 사람들이 합심해서 묵인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여후는 그들의 권위가 불쾌하다고 해서 [[배은망덕|그들이 자신에게 준 도움에 대해 보상해야할 부분에서까지 시치미를 뚝 떼었으니]] 공신들이 배신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유방은 토사구팽으로 악명이 높지만 한편으론 이런 지지층 관리에 신경을 쓴 측면도 있었다. [[옹치]]의 일화도 그렇고, 애시당초 고향 출신 사람들 중에서 유방이 숙청한 인물은 거의 없다. 예외로 [[노관]]은 먼저 반란을 저지르고 도망갔지만 사실 그 [[노관]]도 알고보면 유방보다는 여후가 무서워서 튄 거였다. 오히려 유방이 죽으니 이제 고향가기 글렀다며 좌절했다고 하니 말이다.][* 당장 [[진평]]이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에게 무슨 꼴을 당했는지 보자. 진평은 [[번쾌]]를 살리기 위해 잔꾀를 내고 정권 안정을 위해 여씨에게 군권을 맡기라는 계략을 여후에게 제시할만큼 공신들 중 첫손에 꼽히는 친 여후파였다.] [[섭정]] [[세도 정치|통치를 악용할 경우 합법적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보여준 선구자였으니 어떻게 보면 후대에도 민폐를 끼친 셈이기도 하다. 그렇게 가차없이 왕들을 잡아 죽였으면서 사위 장오가 유방 암살사건에 연루됐을 땐 오히려 장오를 당장 처형하겠다고 벼르는 유방을 밤낮으로 울면서 뜯어말리기도 했다니 영 종잡을 수 없는 인물. 하지만 이는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닌 게, [[가재는 게 편|장오는 여후의 사위였다]]. 사위인 장오가 걱정된 것. 실제로 제왕 유비도 여후의 딸인 노원공주에게 봉지를 넘기자 숙청의 칼날을 피하기도 했고. 그냥 자기 자식은 귀하고 유방이 다른 여자와 낳은 자식은 없애버린 것이다. 숙청은 황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척부인을 죽이기 위해 조왕 유여의를 암살로 처리하고 혜제에게 인간돼지가 된 척부인을 보여주어 정신적인 충격을 줘 사실상 폐인으로 만든 것을 보면 정치적 의도보다는 [[사디즘|자신의 가학적인 감정]]에 가깝다. 아무리 인권이 전무하다시피하던 고대 중국이라도 엄연히 황실의 일원인 만큼 법률에 의한 극형이나 상대적으로 평범한 방식의 암살로 처리했으면 될 일이며 혜제를 정서적으로 학대한 것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행동이였다. 사마천은 저서 사기 여태후본기에서 잔인하고 권력욕에 가득찬 여태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여태후가 척희와 세 명의 조왕을 죽이는 과정 자체에서 나타나는 악독한 성격을 담담한 필치로 기술하였다. 또 효혜제가 '사람돼지'가 곧 척희라는 사실을 알고 '이는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라며 애절하게 탄식했다는 기술은 친자식의 입을 빌려 여태후를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또한 조왕 유우가 유폐된 채 죽기 전에 불렀던 비가를 통해 여태후의 인간성 상실이라는 측면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성토하였다. 사마천은 여태후본기에서 '민심을 얻은 자는 천하를 얻고 민심을 잃은 자는 천하를 잃는다'는 원칙을 다시 한번 천명하고 있다. 잔혹한 형벌, 보복정치, 종친 편애 등은 한때 유방의 숙적이었던 항우와 단점이 매우 비슷하다. 그나마 항우는 주변의 간언이 있든 없든간에 일반 백성들까지도 마구 해쳐 몰락을 자초했으나, 여후는 그래도 계포 등 견제세력이 어느 정도는 있었고, 본인도 [[척부인]]을 제외하고는 자기 기분을 거스르기는 해도 누가 봐도 화를 자초하는 수준으로 어그로를 끌지 않고 확실하게 자신을 위협할 수 없는 사람의 말은 어느 정도 들어준 편이라서 나라까지 말아먹을 개삽질을 벌이진 않았으며, 아무 힘이 없는 백성과 일반 관료들에게는 관대한 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